수업이 끝나고, 강의동 밖을 나가자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망했다. 우산도 없을 뿐더러 학술제 때문에 입고 온 정장이 걸렸다. 학술제는 제끼고 그냥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런식으로 오는 듯 오지 않는 듯 오는 비는 달갑지 않았다. 우산을 쓰기에는 애매하고, 안쓰면 확실하게 옷가지들이 젖어 버리는 그런 비. 차라리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낮인데도 우중충한 회색빛 구름 덕분에 햇빛이 보이지 않는 그런 날씨가 최근들어 계속 되고 있었다.



우산이 없는 바람에 택시라도 타야겠다는 생각으로 한발자국 내딛었다. 이정도면 맞을 만 했지만, 얇은 가을 정장이 젖기에는 충분한 빗방울이었다. 살짝 우울해졌다.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빗방울이 굵어지는 듯 했다. 검은색 힐의 굽이 자꾸만 비에 미끄러졌다. 벗고 맨발로 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학교에는 눈이 많은 법. 그러고 싶다고 생각을 하더라도 실천은 못한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힐이 너무 귀찮게만 여겨졌다. 우선은 선배한테 학술제는 가지 못한다고 연락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꺼내자 '학술제 무조건 참여'같은 문자가 정확히 여덟통이 와 있었다. 조금 서러워졌다. 선후배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우리학과가 미워졌다. 가봤자 재미도 없다. 그냥 다시 마음을 잡고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중간에 튀는 사람이 반 이상 될 것이다. 매년 그래왔으니까.



[선배저오늘컨디션이너무안좋아서학술제못가요정장까지입고왔는데몸이너무안좋네요죄송해요다음에뵈요]



두다다 문자를 써서 급히 보내고는 빨리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보내자마자 지잉지잉- 하고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몰라. 오늘 기분 않좋아. 그냥 전화를 씹었다. 곧 진동소리는 멈췄다. 하지만 얼마 안가 다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스토커도 아니고…… 서너번의 전화는 그냥 모두 무시했다. 나중에 선배한테 까이더라도 그냥 넘기기로 했다. 비는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 사이에 모두 위에 입은 자켓이 젖어버렸다. 애써 셋팅해 온 머리도 흥건히 젖었다. 하아-하고 한숨이 나왔다. 가랑비에 옷 젖는 법이다. 우산을 안들고 나온 내 잘못이지. 오랜만에 신은 힐 덕분에 발은 점점 아파왔다. 엎친데 덮친 격. 짜증보다는 우울한 감정이 더 커졌다.



고개를 숙이고 살짝 한숨을 한번 더 쉬었다. 그냥 처량한 기분이었다. 안그래도 교수한테 과제때문에 까였는데……. 더 서러워졌다. 살짝 눈물이 나왔다. 길바닥에서 울다니, 나도 진짜 한심하다.



"누나!"



"……."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럽다……. 약간은 앳되지만 그래도 늠름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틀림없이 다른사람의 우산을 가져다 주러 왔을 거라고 지레짐작 했다. 저 '누나'라는 사람은 분명히 행복할거야. 나한테 저런 동생이 있다면 분명 잘해줄 수 있을거야……. 나도 우산……. 어떤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부럽다.



고개 숙이고 있는 나는 다가오는 그림자도 보지 못한 채, 속으로 '부럽다 '만 연신 외치고 있었다.



"누나~ 라스누나!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거에요!"


"……아?"

 

갑자기 내 머리 위로 내리던 비가 그쳤다. 나를 부르던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키 큰 남자의 가슴팍이 보였다. 내 주위의 이런 키를 가진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쵸타로?"

 

고개를 더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까이 있으면 키 차이 때문에 보기가 힘들었다. 쵸타로가 노란 우산을 들고 내 옆에 서 있었다. 살짝 미소짓는 쵸타로가 나에게 손수건을 건냈다. 그의 손을 쳐다보았다. 연한 보라색. 손을 뻗어 손수건을 집었다. 그 답게 단색의 깔끔한 손수건이었다. 뭔가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왜? 왜 슬픈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막 울고 싶었다. 서러워졌다. 아, 나는 왜 쵸타로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항상 우울한 날이면 쵸타로에게 전화를 걸곤 했는데.

 

"누나, 왜 울상을 짓고 그래요. 내가 울린 것 같잖아. 전화는 왜 안받았어요?"

 

"─전화? 전화했었어?"

 

"몇번이나 했다구요! 전화 안받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아까 서너번 연속해서 울려대던 휴대폰이 떠올랐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서너번의 부재중 전화에는 모두 [오오토리 쵸타로]가 쓰여져 있었다. 선배라고 생각했던 그 전화가 쵸타로였다니, 살짝 부끄러워졌다. 조용히 미안-이라고 중얼거렸다. 기분이 안좋은 날은 매번 이렇다. 활기찬 나인데도 불구하고, 비 오는 날의 컨디션은 너무나도 저조하다. 쵸타로도 알아 차렸다는 듯이 더 밝게 행동했다.

 

"누나, 저녁 안먹었죠? 오늘 날씨가 이래서 누나 학술제 안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맞아? 그럼 나랑 저녁 먹으러 가요."

 

"응? 저녁?"

 

"아 누나. 우물쭈물 거리지 말고 빨리 와요. 차 끌고 왔어요.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공주님."

 

하하, 하고 자신이 한 말에 꽤나 부끄럽다는 듯이 웃는 쵸타로를 보며 나도 살짝 미소지었다. 쵸타로는 어렸을 적부터 친하게 지내던 동생으로, 한살 아래였다. 누나-누나- 하면서도 잘 따르는 그를 보면 항상 강아지 생각이 났다. 하얗고 북실북실한 재패니즈 스피츠 같은. 동글동글한 까만색 눈에 머리도 은회색으로 물들이는 바람에 강아지 같다라는 생각이 떠나가지 않아서 얼마나 당황했었는데. 나를 너무 잘 따르는 강아지같아서, 항상 이거 해줘- 저거 해줘-라고 어렸을 때에 많이 못살게 굴었던 것 같다.

 

쵸타로가 에스코트 해주면서 나를 그의 차에 태웠다. 검은색 SUV. 쵸타로의 차는 그의 키만큼이나 컸다. '여자 여럿 울리고 다녔겠어, 쵸타로.' 라고 그에게 말했다. 하하, 하고 살짝 찡그리듯이 웃는 그의 미소가 기분 좋았다. 그리고는 점점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쵸타로를 보았다.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지고, 살짝은 긴장. 그래도 여유로운 듯이 그를 쳐다 보았다. 손이 내 쪽으로 뻗어져 오는 듯- 했지만 그의 손은 나를 지나쳐 안전밸트로 향했다. 부드럽게 밸트가 늘려지는 소리가 났다. 철컥- 하고 고리가 연결됐다.

 

"누나, 긴장했지? 하하. 그래도 다른 여자들은 두 눈 꼭 감거나 막 그러던데. 역시 누나~"

 

"짖궂은 녀석."

 

하하하-하고 이번에는 재밌다는 듯 웃는 쵸타로를 보며 나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음 누나 웃음소리 기분 좋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쵸타로의 머리를 살짝 헝클어주었다. 씨익 웃으며 그는 시동을 걸었다.

 

"어디 가는거야?"

 

"어디가긴요. 밥 먹으러 가는거죠."

 

 

***

 

 

"누나, 누나?"

 

"……으응?……."

 

"일어나세요, 예쁜 아가씨."

 

기겁해서 눈을 번쩍 떴다. '에이~ 안일어나면 뽀뽀하려고 했는데.'라는 말을 또 했다. 이번에는 헤헷~ 하는 웃음소리까지 붙여가며. 살짝 내 쪽으로 숙여있는 그의 이마에 딱콩을 먹였다. 살짝 입을 내빼는 쵸타로가 귀여웠다. 안전밸트를 풀고 차 문 밖으로 나왔다. 쵸타로가 아까의 그 노란 우산을 씌워주었다. 잠깐 조는 사이에 비가 세져서 우산에 물방울 부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눈을 들어 가게를 볼 수 있었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도착한 곳은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가족끼리의 만남에서 몇번 와 본적은 있지만, 단 둘이 이런 곳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왜? 멍하니 레스토랑을 바라 보았다. 정신이 없는 사이에 쵸타로가 나를 이끌고 현관까지 왔다. 쵸타로가 나의 어깨를 톡톡, 쳤다.

 

"누나, 들어가요."

 

휘둥그래진 내 눈을 보며 키득거리는 그의 얼굴을 봐도 나의 놀라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쵸타로는 나의 손을 잡고 당당하게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예약이십니까?'라고 정중하게 묻는 웨이터를 보며 쵸타로는 '네, 오오토리 쵸타로. 두명이요.'하고 대답했다.

 

"─예약했어?"

 

"물론이에요, 누나. 오늘 비 올거라는거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살짝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아는 쵸타로는 아까와 같이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역시 고급 레스토랑이라서 분위기가 굉장히 조용했다. 빗소리가 살짝 들리고, 잔잔한 클래식이 그 곳에 깔려 있었다. 웨이터가 안내해 주는 테이블에는 이미 셋팅이 끝나 있었다. 와인과 촛불, 전채요리. 쵸타로가 빼주는 의자에 조심스래 앉았다. 오늘이 학술제여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한켠에 자리 잡았다.

 

우물쭈물하는 나에게 쵸타로가 내 오른 손을 잡더니 조심스래 포크를 쥐어 주었다. 맛있어 보이는 샐러드가 눈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이상하리만치 조용한 레스토랑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지금 이상하다고 느끼는거죠, 라스누나. 맞아. 그냥 통째로 빌렸어."

 

그랬다.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안오는건데. 그런 느낌은 눈치 챘는지, 얼른 먹으라는 독촉의 말이 쵸타로의 입에서 나왔다. 할 수 없이 포크로 샐러드를 살짝 찍어서 먹었다. 맛있다.

 

"응, 맛있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대체."

 

"그냥 누나랑 조용히 둘만 밥 먹고 싶어서. 이렇게 빌릴 수 있는 곳이 얼마 없잖아. 누나 불편할 거 아는데 그냥 레스토랑 빌렸어요."

 

그랬구나. 조용히 말하는 내 목소리를 긍정의 의미로 받아 들인 쵸타로가 살짝 미소 지었다. 이왕 온 김에 불편해도 맛있게 먹고 가야겠다. 쵸타로를 봐서라도.
오늘은 상당히 우울했다. 도대체 왜 우울했었는지 모를 정도로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따뜻한 불빛이 나오는 초가 내 왼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괜스래 초를 꺼보고 싶어졌다. 초를 쳐다보는 나의 눈빛을 느낀 쵸타로는 '에이 그러지 마요, 누나.'라고 저지했다. 살짝 부끄러워졌다.

 

"다음 요리 나왔습니다."

 

음식을 올려놓은 수레와 함께 여러명의 웨이터들이 같이 나왔다. 커다란 은색의 둥근 덮개가 요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해주었다. 한 웨이터가 그것을 테이블로 옮겨주었다. 뚜껑을 여는 순간-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라스님의- 생일 축하합니다-"

 

맛있어 보이는 딸기 케이크가 자리잡고 있었다. 곁에서 터지는 폭죽들이 나를 실감나게 해주었다. 아, 오늘 내 생일이었구나.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이유- 쵸타로가 나에게 온 이유-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이유- 이곳을 통째로 빌린 이유.

 

"누나, 생일축하해.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었어."

 

어느새 일어나 내 곁에 온 쵸타로가 귀에 속삭여 주었다. 다시 한번 눈물이 나오려 했다. 팔을 뻗어 쵸타로의 목을 감쌌다. 숙이고 있던 쵸타로는 한쪽 무릎을 꿇고 나의 허리를 감아 주었다.

 

"사랑해요, 아가씨. 태어나 줘서 고마워. 그리고 생일축하해."

 

fin.